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정말이지 명작임에 틀림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 인물의 업적을 기록하는 영화가 좋다. 요즘은 IT 산업의 거물들에 관한 영화들을 즐겨 찾아봤는데 더 마땅한 영화를 찾기가 힘들어 다른 산업으로 눈을 돌렸더니 하워드 휴즈를 알게 되었다. 몇몇은 하워드 휴즈에 대한 강박증세를 그린 디카프리오의 연기를 비난하고 지루하기 짝이없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하던데 (네이버 영화 기준) 그런 장면들이 영화에 삽입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휴즈를 그리기 위한 연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니 그 후기들에 현혹되지 않고 그를 궁금해하는 이라면 마음 놓고 영화를 보아도 되지 않나 싶다.
아래는 에비에이션 영화를 보고 하워드 휴즈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한 기록.
(기록 자체가 영화의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주의! 그러나 그를 알고 영화를 보든 영화를 보고 그를 찾아 보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수 있으니!)
하워드 로바드 휴즈 2세(Howard Robard Hughes, Jr, 1905~1976)는 미국의 투자가, 비행사, 공학자, 영화 제작자, 감독, 자선가이다. 공학적 재능과 사업적 수완으로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공학자로써는 항공 우주, 인공위성, 첩보기술을 선도했고 자본가로써는 라스베가스에 최초로 대규모 부동산 투기를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도전가였으며 이는 그의 성공 요인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괴팍하고 기이한 행동들이었다. 갑작스런 종적 감추기, 상식을 넘어선 크리넥스(휴지) 집착증,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는 영화 감상, 필기에 대한 집착으로 지시사항을 반복 기록,
극도의 세균 공포증에 시달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하지 않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그는 세간의
이슈가 되었다. 하워드 휴즈의 이런 이상 행동들을 당시 사람들은 그저 억만장자의 변덕이나 기행쯤으로만 생각했다.
1905년 하워드 휴즈는 휴스턴의 대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휴즈 공구 회사를 가진 그의 아버지는 혁신적인 석유 시추용 드릴을 개발했고 뛰어난 사업 수단으로 전 세계 시장을
개척해 엄청난 수익을 걷어드렸다. 덕분에
휴즈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워드 휴즈는 15살 때 직접 비행기를 몰수 있었고 이 경험을 계기로 비행에 푹 빠져들었다. 2년 간격으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면서 18살에 하워드 휴즈는 고아가 됐으며 막대한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업가보다는 비행기 조종사와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런 휴즈의 꿈은 그에게 뜻밖의 불행을 안겨다 주었다. 1976년 4월에 진행된
부검에서 의사들은 하워드 휴즈가 최소 3차례나 두개골 골절상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첫 번째 대형 사고는 사망하기 약 50년 전인 1928년 그의 유명한 영화 ' 지옥의 천사들 ' 촬영 기간에 발생했다. 당시 역대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여배우 진 할로를 세계적인 여배우로 만들었으며 하워드 휴즈가
직접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완벽한 공중 전투 신을 찍기 위해 많은 비행사를 고용했던 하워드 휴즈는 비행사 한 명이 위험한 저공비행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스턴트 비행을 했다. 그 결과
비행기는 추락했고 휴즈는 처음으로 심각한 뇌진탕을 일으켰다. 하워드 휴즈는 지옥의 천사들 제작에 꼬박 3년을 투자했다. 그동안 완벽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 수많은 장면을 재촬영했고 밤낮을 쉬지 않고 편집 작업에 몰두했다. 주변 사람들은 휴즈가 완벽한 영화를 만들려는 강박증에 쌓여있다고만 생각했고 이것이 젊은 억만장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했다.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400만 달러를 쏟아부은 끝에 1930년 1월 30일, 그라우만스 차이니즈 극장에서 '지옥의 천사들 ' 첫 시사회가 열렸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시사회였으며 50만 명이 이를 지켜보기 위해 거리를
메웠다.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공중 전투신은 역대 최고의 장면으로 호평받았다.
이를 계기로 하워드 휴즈는 더욱더 비행에 빠져들었다. 1932년, 휴즈 항공사를
설립한 하워드 휴즈는 회사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가명을 써서 텍사스주 아메리칸 항공에 수화물 담당자로 취직했다. 수화물 담당자가 된지 몇 주 되지 않아 하워드 휴즈는 부조종사로 승진했고 그의 정체가 탄로나 자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하워드 휴즈는 비행기를 설계하기 시작하고 시험 비행에 나섰다. 그가 만든 첫 번째 비행기는 H1 실버불렛으로 날렵한 경주용 비행기였다. 휴즈는 이 비행기에 많은 신기술을 도입했다.
H1 실버불렛은 그의 공학적 천재성과 비행속도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였다.
1935년 9월, 실버 블렛이 사탕수수밭에 불시착하자 하워드 휴즈는 그 즉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고 경위를 설명했고 직접 기자회견 장면을 감독하며 수차례 재촬영했다. 이 기자회견 하워드 휴즈는 계속해서 바지를 잡아당기며 눈에 띄는 불안 장애 증상을 보였다. 이것은 그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43년, 휴즈는 신형 수상비행기 S43을 조종하다 호수에 또다시 불시착했다. 그는 또다시 머리에 중상을 입었고 승무원 한 명이 사망했다. 같이
탄 승무원의 사망은 휴즈에게 큰 충격을 줬을 것이다. 이 사고로 하워드 휴즈의 괴이한 행동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세균 공포증으로 인한 반복적인 손 씻기는 어릴 적부터 계속됐고 자신의 업무와 지시 사항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확인했다. 또한 물건을 완벽하게 대칭으로 정돈하려고 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강박성 장애에 해당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강박성 장애가 잘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불가능했다.
1940년대, 하워드 휴즈가
설립한 회사들은 빠르게 팽창해나갔지만 그는 정신적 휴식을 취할만한 시간조차 갖지 못 했다. 그의 기행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휴즈 항공사는 다수의 무기 개발 계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HK1과 신형 고공정찰기의 시제품인
XF11이 여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두 사업 모두 휴즈의 잦은 설계도면 변경 때문에 예산과
기한을 초과하고 말았다. 특히 휴즈는 XF11을 차세대 비행기로써 선보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직접 시험 비행을 했다. 1946년 7월 7일, XF11을 탄 휴즈는 45분
동안 완벽하게 LA 상공을 높고 빠르게 비행하였으나 갑자기 프로펠러가 고장 나며 LA 골프장 근처 베벌리힐즈 주택 지붕을
뚫고 추락해버렸다. 이 대형 추락 사고에 사람들은 하워드 휴즈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휴즈의 상태는 위독했고 의사들은 살 가망성이 별로 없음을 휴즈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 사고로 휴즈는 죽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었으며 3도
화상과 거의 모든 늑골과 경추 3개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하워드 휴즈는 다량의 진통제로 해결했다. 이후 10년 동안 하워드 휴즈는 매일 진통제를 먹었으며 그 양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성들과의 스캔들은 그가 이룩한 항공분야의 업적만큼이나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1925년 헐리우드로 처음 왔을 때 하워드 휴즈는 아내가 있었지만
많은 여성들과 교제했고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한 1946년엔 이미 이혼한지 오래였다. 잘생긴 외모에 부자였던 그는 여자들에게 선물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하워드 휴즈는 여성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감정적으로 그녀들에게 끌리진 않았던듯하다. 그는 동시에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자신의 연애행각이 들통 나지 않도록 비밀유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컨피덴셜이란 3류 잡지에서 하워드 휴즈의 여성 관계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이에 하워드 휴즈는 격분했다. 하워드 휴즈는 잡지가 발매되자 자신이 만나던 여성들이 잡지를 보지 못하도록 모두 사들이라고 지시했다. 그는 영화제작자라는 위치를 이용해 여배우로 만들어주겠다며 끊임없이 신인 여배우들을 유혹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아파트와 생활비, 각종 연기 공부에 필요한 모든
교육비까지 지급했다. 휴즈는 여자친구에 대한 의심이 병적일 정도여서 탐정을 고용해 철저히 감시했고 그녀들이 먹는 음식부터 만나는 사람까지
모두 통제했다. 여자들과 교류하던 중 휴즈는 매독에 걸렸고 그의 세균 공포증은 더욱 심해졌다.
1950년대, 하워드 휴즈는 RKO라는 영화사를 소유하면서 헐리우드의 확고한 거물이 되었고 극비의 통신 및 첩보기술을 개발하는 대형 항공
우주회사도 설립했다. 1940년대 말, TWA 항공사를
인수받은 휴즈는 최초의 대륙 횡단 노선을 만들어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1947년, 42살의 하워드
휴즈는 정부와 맺은 계약에 비리가 있다는 의혹을 받고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에서 자신의 회사가 전쟁으로 인해 폭리를 취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청문회 내내 휴즈는 당당했고 의회와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 부분은 영화 '에비에이터'에서 잘 드러난다. 하워드 휴즈는 이때를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50대가 된 하워드 휴즈의 강박성 장애가 매우 심각해졌다. 그는 타인과의 악수는 물론 문 손잡이도 맨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회사 경영에 필요한 지시사항은 전화로 반복적으로 전달했으며 조금이라도 어긋날 시 불같이 화를 냈다. 1957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사업 파트너들과 친한 동료들까지 그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워드 휴즈는 이때 10여 년 동안 교제해온 진 피터스라는 여배우와
결혼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휴즈가 진 피터스와 결혼을 결정한 이유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데 그중 하나가 자신을 정신병원에 수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종적인 아내를 만들어 이를 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워드 휴즈는 결혼한 지 1년도 안돼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기이한 일화를
남겼다.
1957년 11월, 그는 선셋 대로에 있는 나섹 스튜디오의 어두운 영상실에서 두문불출하며 4개월
이상을 지냈다. 그는 나체로 앉은 채 영화를 보며 초콜릿과 우유만으로 식사를 했고 회사 업무는 전화를 통해 해결했다. 필요한 것들은 종이에 아주 자세하게 적어 측근들에게 전달했다. 측근들은
그를 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또한 휴즈는 수십 개의 크리넥스 휴지 상자를 쌓고 다시 쌓는 행동을 반복했다.
이 모든 것이 강박성 장애의 징후들이다. 4개월이 지난 후 드디어
하워드 휴즈는 영상실에서 나왔다. 몇 달째 목욕이나 면도도 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거지나 따로 없었다. 그는
나섹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영상실은 나온 휴즈는 베버리힐즈 호텔에서 몇 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호텔 생활 동안 자신의 측근, 아내, 여자친구들을 위해 많은
객실을 임대하기도 했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호텔에서도 계속됐다. 휴즈는 호텔의 분홍색 수건만은
걸친 채 나체로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휴즈 자신의 회사들을 계속해서 성장시키며 이끌어나갔다는 것이다.
FBI는 하워드 휴즈를 평생 감시하고 쫓아다녔다. 정부는 최대 군수 계약업체인 휴즈의 회사가 정치권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FBI는 휴즈의 정신 상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휴즈의 사업 대부분이 국가 방위와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법원은 TWA 항공사 자금을 부당하게 사용했다며 경영권을 포기하란 명령 내렸다. 하지만 회사 주식의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었던 하워드 휴즈는 매각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워드 휴즈는 이 모든 사항을 어두운 호텔 방안에서 전화 와 쪽지만으로 해결했다. 또한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약물 사용량을 늘렸다. 1966년, 휴즈는 건강이
악화되자 애착을 가졌던 TWA 항공사의 주식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스베가스의 데져트 인 호텔 펜트하우스에 투숙한 하워드 휴즈는 다른 고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펜트하우스를 비워달란
호텔의 요청에 호텔을 통째로 사들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휴즈는 아직 미개척지이던 라스베가스에 큰 투자했다. 몇 년 만에 하워드 휴즈는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하워드 휴즈의 기행은 더욱 이상해졌다. 충동적으로 지역방송국을
사들인 후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볼 특정 영화를 방송하도록 했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을 호텔이란 감옥 속에 가두어두었다. 하워드 휴즈와 이혼한 진 피터스는 그가 정신이상자이며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얼마 후 휴즈는 런던으로 건너갔고 이번에도 호텔에 묵었다. 1972년 6월, 하워드 휴즈는 다시 한번 비행기 조종에 나섰다. 조종석에 앉은 휴즈는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런던 상공을 비행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런던에 추락하며
하워드 휴즈는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부상으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휴즈는 진통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하워드 휴즈는 1976년 4월 5일,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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