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재연 개인블로그
나는 2004년에 입학했지만, 교환학생, 휴학, 병역 등을 다 하다 보니 2012년 봄에야 졸업했다. 약 8년에 가까운 기간이기 때문에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긴 기간이지만, 지나고 보면 매우 짧았다.
더구나, 나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고, 기왕이면 이수 학점이 많을 때 장학금을 받는 게 유리하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첫학기만 제외하고 매학기 평균 20학점 이상씩 채워 들었다. 9학기 178학점을 평점평균 4.14/4.5로 이수하고 나니, 어느새 졸업할 때가 다 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2009년 한 해에 공모전 다섯 곳에서 대상을 포함해 상을 받았다. 2010년에 첫책을 써서 문화부에서 우수교양도서로 선정이 됐다. 2011년에 네이버에서 서비스 자문위원을 했다. 그때도 유학을 갈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2011년 봄에 미국 대학원 지원 관문 중 하나인 GRE(일명 지랄이)를 보기도 했고, 원서도 썼었다. 스펙이 나쁘지 않으니, 당연히 갈 곳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2012년 봄이 되었을 때, 내가 갈 곳은 없었다.
그때는 속이 상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교만했다는 걸 알았다. 당시는 내 원래 전공인 정치학이 아닌 사회학 내지 커뮤니케이션학쪽으로 해외 박사 유학을 지원했었다. 학부생이 내 전공을 제대로 준비해서 미국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어드미션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전공 수업 하나 들어본 적이 없는 남의 전공에 요즘처럼 경쟁률 치열한 시절에 어드미션을 받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스탠포드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웨이트리스트에 오르기도 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후에는 유학은 길이 아닌가 싶어, 맥킨지, 베인 같은 곳에 원서를 써서 서류 통과를 하기도 했고, 구글 코리아와 면접을 보기도 했다. 컨설팅 회사는 여러 선배들과의 상담 및 내 자신의 경험 후에 내 길은 아니란 걸 깨달았고, 인터넷 기업은 그때 합격했으면, 잔류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역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스타트업에서 매니저 생활을 할 때, 룸메이트가 결혼을 하기도 했고, 나도 결혼 준비를 해야 해서 잠시 경기 북부에 있던 부모님집에 들어가 있었다. 홍대 근처에 있는 회사와 경기북부에 있는 부모님집까지는 왕복 4시간 가까운 통근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킨들을 통해서 꾸준히 원서로 전공 서적과 논문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또한 운이 굉장히 좋아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장학재단에 해외 유학 장학생 후보로 선발될 수 있었다. 그때 선발되지 않았더라면, 유학의 꿈과 학문의 길은 아예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후의 상황도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다. 여름에 장학재단에 합격을 했지만, 가을에 결혼을 했고, 그리고 그 다음해 봄 아버지께서 갑자기 암으로 쓰러지셨다. 집안 경제도 더 어려워졌고, 마음도 더 힘들어졌다. 해야 할 일은 더 많아졌고,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역설적인 건, 그때가 되서야 정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에 사표를 썼고, 학문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을 했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도 국내 학회지에 낼 논문을 준비했다. 그때는 정말 밤낮을 다해가며, 논문을 읽고, 논문을 썼다. 어릴 때부터 난 힘든 일이 있으면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게 내 나름대로 내 자신이 스스로 슬픔을 달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포기할 건 포기할 수가 있었다. 역시 돌이켜보면 졸업 전후로 상당 기간 방황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그 부족한 능력을 집중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스펙이 쌓였고, 스펙이 쌓이면서 내가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았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말았어야 했다. 내 전공이 아닌 사회학, 커뮤니케이션학에 관심을 가졌던 건 내 전공보다 그쪽 전공들이 더 재미있는 게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정치학을 제대로 공부해 보니, 정치학이 나한테는 더 재미있었고, 더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단지, 내 공부가 얕았을 뿐이였다.
그리고 컨설팅을 해라, 인터넷 기업에 가야 한다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보니 자기가 그쪽 커리어를 쌓고 싶은 사람들이였다. 오히려 그 분야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은 나를 말렸었다. 단지, 내 귀가 얕았을 뿐이었고, 내 자신에 대한 부정적 확신(난 이건 못한다 혹은 이건 하지 말아야 한다.)이 부족했다.
가정의 위기,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거치고 나서야 내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재점검할 수 있고, 내 자신을 겸손하고,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었고, 내가 갈 길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그해 5월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는데,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내가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이전의 내 학문적 관심이 인터넷(기술)과 사회 같은 다소 추상적인 이슈에 있었다면, 냉엄한 현실의 벽과 부딪치는 가운데, 거품이 빠졌다. 남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었다.
일례로, 부친상을 치르고 나서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내 아버지, 베이비붐 세대를 위한 조사‘란 글의 말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 마음껏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규범적으로뿐만 아니라 실리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다.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정의의 실현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경제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데 중요한 동기 부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쓴 글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을 놓고 쓴 글이기도 하다. 나는 혁신경제와 복지국가 사이의 균형점을 찾고 싶었고, 동아시아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이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잘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잘 하고 싶은 연구 분야로 ‘비교정치경제학’과 ‘동아시아’를 정하고, 가장 가고 싶은 학교로 그 두 분야에서 모두 강한 UC Berkeley를 정했다. 아내의 도움을 받고, 틈틈이 강의, 기고, 연구 용역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가면서, 유학을 다시 준비했다. 그리고 2014년 2월에 어드미션을 받고, 올해 가을학기부터는 이제 목표했던 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시작한다.
여기까지 과정은 지난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을 통해 깨달은 분명한 교훈은 있다. 그건 스펙과 커리어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스펙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뭔가를 더하는 것의 문제지만, 커리어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정하기 위해서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련 때문에, 욕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나는 그게 쉽지 않았다. 돌아서, 돌아서, 내 자신의 배경과 성장 과정을 받아들이고, 그제서야 이제 조금 갈 길을 가게 됐다. 물론, 그렇게 헤맸던 시간이 다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 그 시간을 통해서 내 자신과 사회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고, 그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은 다 나의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좀 더 일찍 집중할 수 있었다면, 포기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스펙과 커리어는 같지 않다. 한 학기, 한 학기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는 건 부족하다. 남이 가는 길을 나도 따라가는 건, 진정한 동기가 되지 못한다. 어느 길이건, 쉽지 않다. 법조계, 의료계 다 좋은 직업이라고 얘기하지만, 매일 나쁜 놈들, 아픈 분들 상대하는 그 사람들도 고충이 많다. 일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세상일에는 ‘불확실성’이 예외없이 따른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절실함’이,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소명’이 자기에게 있느냐하는 문제다.
나는 교만하고 어리석어 그 팩트를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후배들이 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스펙은 커리어가 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능력과 성취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절실함’과 ‘소명’을 잘 키워나가길 바란다. 학부 저학년 때에는 이력서(resume)에 한 줄이라도 더 집어넣는 게 문제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커리어를 만드는 건 그 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과 성취들의 일관성, 집중력이다.
버릴 걸 버릴 때, 더 많은 걸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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